“아, 이제는 진짜 좀 무너질 것 같다.”
가끔 예고도 없이 그런 날이 찾아온다.
별다른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숨이 자꾸 가빠지고,
감당해야 할 일상 전체가 거대한 파도처럼 한꺼번에 나를 덮쳐오는 느낌이 드는 날.
예전의 나는 그럴수록 더 버티려는 쪽을 택했다.
억지로 책상 앞에 다시 앉고, 흩어지는 정신을 붙잡으며
“이럴 때일수록 정신 차려야지”라고 스스로를 다그쳤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를 악물수록 아무것도 되지 않았다.
몸은 책상 앞에 앉아 있지만, 마음은 이미 바닥난 배터리처럼 완전히 방전되어 있었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방법을 바꾸기로 했다.
버티는 대신, 잠시 나를 놓아주기로 한 것이다.
그냥, 보고 싶었던 것들을 본다
요즘 내가 마음이 무너질 때 택하는 방식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그동안 ‘시간 나면 봐야지’ 하고 미뤄두었던 것들을 그냥 하나씩 꺼내 보는 것이다.
찜해두고 못 본 유튜브 영상들, 1화만 보고 멈춰둔 드라마,
책장에 꽂아두고 언젠가 읽어야지 했던 책들.
마음이 바닥까지 내려간 날에는 이것들을 하나씩 꺼내 본다.
여기에는 어떤 성과도, 자기계발의 의미도 부여하지 않는다.
그저 지금의 나를 위해 시간을 쓴다.
겉으로 보면 현실 도피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 시간을 ‘버리는 시간’이라고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이것은 내 머리를 잠시 다른 세상으로 채우는 일이기 때문이다.
머릿속 채널을 돌리는 시간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는 날이면
우리 뇌는 고장 난 라디오처럼 같은 문장을 무한 반복한다.
“왜 그렇게밖에 못 했지”, “앞으로 어떻게 하지”, “나만 뒤처지는 건가”.
계속해서 ‘나’와 ‘현실’이라는 채널만 틀어놓는 셈이다.
그런데 책이든, 유튜브든, 드라마든 타인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이 채널이 잠시 강제로 돌아간다.
누군가의 인터뷰를 보며 그 사람의 삶에 집중하고,
드라마 속 인물에게 감정을 이입하다 보면,
아주 잠깐이라도 내 현실의 문제에서 빠져나오는 틈이 생긴다.
물론 영상을 끈다고 현실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하지만 내 뇌가 “지금 이 순간, 나를 계속 물어뜯는 일”에서 잠시 손을 떼게 해 줄 수는 있다.
나는 이 시간을 아무 생각 없이 널브러지는 시간이 아니라,
“과열된 내 머리를 식히고 스스로를 좀 쉬게 해주는 시간”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죄책감 대신 ‘숨 고르기’라는 이름을 붙여주세요
우리는 이상하게 쉬는 시간이 생기면 죄책감부터 세팅해 두곤 한다.
누워서 영상을 보고 있으면 “또 시간만 버렸네”라는 생각이 들고,
드라마를 보고 나면 “이럴 시간에 생산적인 걸 해야 하는데”라며 스스로를 찌른다.
하지만 마음이 무너질 것 같은 날에는 그 죄책감마저 사치다.
당신은 이미 충분히 버텼고, 이미 과하게 생각했고, 그 생각들 때문에 탈진한 상태니까.
그래서 나는 이렇게 정의했다. “이 시간은 도망치는 시간이 아니라,
다시 살아보려고 숨을 고르는 시간이다.”
누워서 유튜브를 보더라도, 멍하니 예능을 틀어놓더라도,
그 시간이 지나고 나서 조금이라도 덜 날카로워진 나를 발견한다면 그것으로 된 거다.
“그래, 오늘은 여기까지 했으면 됐지.” 이 말을 스스로에게 해줄 수 있다면,
그 시간은 이미 충분히 가치 있게 쓰인 것이다.
무너지지 않고 내일로 건너가는 법
세상은 끊임없이 말한다. 성장해야 한다고, 뭐라도 해야 한다고, 이럴 때일수록 더 달려야 한다고.
하지만 마음이 완전히 부서지기 직전에는, 아무리 좋은 말도 들리지 않는다.
그럴 땐 일단 나를 현실에서 잠깐 빼내 오는 일이 먼저다.
정리와 다짐, 계획은 그다음 문제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마음이 흔들리면 하던 일을 멈춘다.
보고 싶었던 책을 펼치고, 찜해둔 영상을 틀고, 이어 보던 드라마를 재생한다.
남들이 보면 그저 게으름을 피우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나에게는 그 시간이 “나, 아직 여기 있다”는 감각을 다시 붙잡는 생존의 시간이다.
오늘 하루를 버티느라 고생한 나를 위해, 조금은 의도적으로,
그리고 조금은 뻔뻔하게 나부터 챙기는 시간을 가져보자.
그게 무너지지 않고 내일로 건너가는 나만의 작은 다리가 되어줄 테니까.
당신도 지금 마음이 무너질 것 같은가.
괜찮다. 오늘은 나부터 챙기자.
도망이 아니라 숨 고르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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